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차 갓산토다 성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오우치는 전국시대 이전부터 수백년간 이어져 온 명문 [[슈고 다이묘]]로, [[주고쿠]]의 스오, 나가토 2개 국과 [[규슈]] 북부의 지쿠젠, 부젠을 지배하면서 오랫동안 일본 서부의 강력한 가문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우치 요시오키]]가 교토에서 벌어지던 [[무로마치 막부]] 중앙 정계에 개입하기 위해[* 10대 [[쇼군]]이었다가 메이오 정변으로 쫓겨나 지방을 떠돌던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지지하고 11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쫓아낸 뒤 [[간레이]]다이(대리인)에 오르고, 이후로도 요시타네에 반대하는 적들과 싸웠다.] 상경하여 10여 년 동안 교토에 머물러 있을 때 [[아마고 츠네히사]]가 등장해 이즈모, 이와미 등을 장악하고 오우치가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키, 빈고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요시오키의 교토 상락 때 츠네히사 역시 연합 형식으로 같이 있었으나 이후 곧바로 귀환해서 빈집털이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요시오키는 귀환한 이후 아마고와 기나긴 전쟁을 벌였으나 츠네히사를 제압하지 못하고 사망하여, 당주의 자리는 그 아들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물려졌다. 그 후 두 가문은 아키 등지에서 국지전을 벌이며 팽팽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아마고 츠네히사가 은거하고 [[아마고 하루히사]]가 아마고의 당주가 되었다. 하루히사는 오우치에게 종속되어 있던 아키의 고쿠진들에 대한 공세를 가했으나, 그들의 수장격이던 [[모리 모토나리]]의 거성 요시다고리 산성 등지에서 가로막혀 지지부진한 공성을 벌인 결과, 오히려 오우치의 원군을 얻은 모토나리에 의하여 역공당해 패퇴하였다. 하루히사의 군사적 입지가 줄어든 데에 더하여 은거해 있던 츠네히사까지 사망하는 악재가 겹치자 아마고 가의 기세는 이전과 비할 수 없이 위축되었다. 오우치 가 당주 요시타카는 이에 기세를 몰아 아마고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거병, 아마고령 깊숙히 진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